연습장 세 쪽에 연필로 적힌 이야기가 5억원대 영화가 됐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실낙원’은 거대한 기획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명절에 건넨 짧은 메모에서 출발했다. 연 감독은 아이디어를 그냥 가져오지 않고 어머니에게 값을 치르고 샀다고 밝혔다. 가족끼리 오간 작은 이야기가 토론토국제영화제까지 향한 셈이다.

영화는 아들을 잃은 뒤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슬픔을 견뎌 온 엄마 소영 앞에, 실종됐던 아들 선우가 9년 만에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김현주가 엄마 소영을, 첫 영화 주연에 나선 배현성이 아들 선우를 맡았다. 가상 세계에서 만난 익숙한 아이와 현실로 돌아온 낯선 청년 사이의 간극이 모자의 재회를 흔든다. 완벽한 낙원보다 불편한 현실을 택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존 밀턴의 서사시와 같은 제목을 붙였다.

세 쪽짜리 원안이 곧바로 영화가 된 것은 아니다. 연 감독은 오랜 시간 이야기를 세 가지 버전으로 고쳤고, 그중 한 버전은 오성은 작가의 소설 ‘블랙 인페르노’로 먼저 세상에 나왔다. 마지막 버전인 영화는 AI가 일상 가까이 들어온 지금의 감각을 담아 인간의 정체성과 어두운 내면을 파고든다. 연 감독 스스로 지금까지 구상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어둡고, 결말을 두고 호불호가 크게 갈릴 작품이라고 예고했다.

‘실낙원’은 지난해 ‘얼굴’에 이어 연상호 감독이 저예산 제작 방식을 이어간 작품이기도 하다. 순제작비는 5억원대로 알려졌다. 직접 원하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의 자유로움에 끌렸다는 설명이다. 연 감독은 김현주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며 30년 연기의 진가를 볼 수 있다고 자신했고, 배현성에게서는 기존의 밝은 이미지와 다른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응은 이미 해외에서 먼저 시작됐다. 제51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된 뒤 공식 상영 네 차례가 매진됐다. 국내 개봉일은 10월 21일이다. 어머니의 메모를 산 감독이 가족의 감정을 어디까지 어둡게 밀어붙였는지, 그리고 가상의 위로보다 불완전한 현실을 택하는 결말이 관객에게 어떤 여운을 남길지가 가장 궁금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