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제작비 4000억원, 한국 영화 ‘호프’의 제작비 500억원. 유지태는 두 숫자를 나란히 놓고도 한국 영화가 이길 자리는 분명하다고 말했다. 자본의 크기를 따라가는 대신 감독의 세계와 색깔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 바로 그 차이가 관객이 한국 영화를 선택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이야기였다.
유지태는 25일 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하모니 골드 프리뷰 하우스에서 열린 LA한국영화제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했다. 이날 상영작은 허진호 감독의 2001년 영화 ‘봄날은 간다’. 그는 마블 같은 대형 시리즈에는 검증된 공식이 있지만, 비슷한 작품이 이어지면 관객이 새 스타일의 감독을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큰돈으로 정면승부하기 어려운 한국 영화에 감독의 개성이 중요한 이유다.
현장에서는 과거 한국 영화 촬영장의 풍경도 꺼냈다. 한 장면을 60번 찍기도 했고, 남극에서 원하는 눈이 쌓일 때까지 촬영을 멈추고 기다린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효율만 보면 낯선 방식이지만, 감독이 만족할 때까지 밀어붙인 시간이 화면에 고유한 질감을 남겼다는 뜻으로 읽힌다. 유지태는 영화가 ‘감독 예술’이라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뒀다.
‘봄날은 간다’에 대한 기억은 조금 더 개인적이었다. 그는 상우라는 인물에 자신의 면모가 담겼고 감독과 감성이 닮아 연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이영애가 연기한 은수는 당시 새로운 여성상이어서 현장에서 함께 만들어간 인물이라고 돌아봤다. 25년이 지나도 사랑의 온도와 이별의 여운이 회자되는 영화가 어떻게 완성됐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배우로 알려진 유지태는 2013년 ‘마이 라띠마’를 연출했고, 이후에도 시나리오와 웹툰 작업을 이어왔다. 이번 자리에서는 디아스포라와 동포 사회를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계획도 밝혔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 가치가 있다고 본다는 설명이다.
그가 말한 다음 승부수는 거창한 기술이나 더 큰 예산이 아니었다. 상업성과 창작성이 함께 갈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창작자의 생각이 분명하게 보이는 영화였다. 오래된 멜로 한 편을 다시 본 LA의 밤은 한국 영화가 어디에서 새 힘을 찾을 수 있는지 묻는 자리로 이어졌다.
